빠르게 성장하는 산업에서는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빈자리입니다.
5년 전 열 명이던 스타트업이 해마다 50명, 100명씩 사람을 뽑는다면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느새 조직장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직이 사람보다 빠르게 커지는 동안에는 승진으로 가는 길도 곧게 열립니다.
10년 전 AI가 그랬고, 20년 전 빅데이터도 비슷했습니다. 아직 전문가가 많지 않은 시기에는 중요한 키워드를 이해하고 몇 번의 프로젝트를 경험한 것만으로도 다음 역할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산업이 빠르게 커지면 경험의 부족을 성장의 속도가 메워줍니다. 사람에게 맡길 자리를 찾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성장이 둔화되면 문제는 반대로 바뀝니다. 새로 생기는 자리는 줄어드는데, 기존의 자리는 쉽게 비지 않습니다. 축적된 지식과 인맥, 판단력처럼 반감기가 긴 자질이 필요한 일일수록 그렇습니다. 로펌과 컨설팅 회사, 대기업의 전략 조직 같은 곳에서 이 문제는 더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산업이 구성원에게 약속한 사회계약은 생각보다 짧게 지속됩니다. 성장하는 동안에는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은 경험을 쌓으면 더 큰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약속이 자연스럽게 작동합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조직이 계속 커지고 새로운 자리가 생긴다는 조건 위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제조업의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도 영원한 질서라기보다 특정한 시기의 결과에 가까웠습니다. 전후 노동력 부족과 강한 노조, 기업의 확장이 함께 가능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그때 만들어진 계약이 계속 유지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문제는 계약의 첫 수혜자들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더 커집니다. 물러날 이유는 없고, 아래에서는 새로 올라갈 자리도 생기지 않습니다. 산업이 약속했던 사다리는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장이 만든 자리를 개인의 능력만으로 얻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성장이 멈춘 뒤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을 개인의 실패로 돌리기도 쉽습니다. 둘 다 정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경력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만 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올라탄 산업이 얼마나 빠르게 커지고 있었는지도 함께 봐야 합니다.